미중 경쟁과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긴장 동아시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미중 간 전략 경쟁이 격화되면서 대만 해협, 한반도, 남중국해를 중심으로 지정학적 균형이 변화하고 있다. 여기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가 글로벌 질서를 재편하고,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이 추가적인 불안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단순한 지역적 갈등을 넘어 새로운 신냉전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동아시아 안보 환경이 과거 냉전 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예측불가능하며, 다극화된 질서 속에서 각국의 행동이 상호 연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경고한다. 케빈 러드(Kevin Rudd) 전 호주 총리는 2026년 4월 20일 프로젝트 신디케이트에 기고한 '신냉전 시대, 동아시아 안보의 새로운 방정식'에서 "21세기 신냉전의 중심은 더 이상 유럽이 아닌 아시아"라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곳으로 대만 해협을 꼽으며, 이 지역에서의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역내 전반적인 불안정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대만 해협은 세계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거점으로, 글로벌 경제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전략적 요충지다. 러드는 이러한 안보 환경이 단순히 군사적 문제가 아니라 기술적, 경제적으로도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한 국가의 행동이 다른 국가의 안보를 위협하며 군비 경쟁을 촉발하는 이른바 안보 딜레마(Security Dilemma)가 동아시아 전역에 깔려 있다"고 밝혔다. 중국의 군사력 증강은 이러한 안보 딜레마의 핵심 요인이다. 중국은 지난 10여 년간 국방비를 지속적으로 증액하며 해군력과 공군력을 현대화해왔고, 특히 대만 해협에서의 군사 훈련을 강화하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강화하며 역내 동맹국들과의 협력을 심화하고 있다. 2021년 출범한 오커스(AUKUS) 안보 동맹이나 쿼드(QUAD) 협의체는 이러한 전략의 일환이다. 러드는 이러한 동맹 강화가 필요한 조치이지만, 동시에 중국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군비 경쟁을 더욱 가속화할 수 있는 양날의 검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안보 딜레마의 또 다른 축은 북한이다. 북한은 최근 몇 년간 잦은 미사일 시험발사와 핵개발로 주변국에 끊임없이 위협을 가하고 있다. 2022년부터 2024년까지 북한은 100회 이상의 미사일 발사 실험을 단행했으며, 핵 능력 고도화를 지속하고 있다. 러드는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 단순한 지역적 문제가 아니라 미중 경쟁 구도 속에서 전략적 복잡성을 더한다고 분석했다. 북한의 위협은 한국, 미국, 일본의 안보 협력 강화로 이어지고 있으며, 이는 다시 중국과 러시아의 우려를 자극하는 악순환을 만들어내고 있다. 실제로 북한의 도발은 한미일 삼각 안보 협력의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 2023년 8월,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의는 북핵 억지력 강화와 정보 공유 시스템 확립 등 지역 안보를 위한 전략적 협력을 강조했다. 세 나라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연합 군사 훈련을 정례화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러드가 지적하듯이, 한미일의 협력 강화는 또 다른 도전도 낳을 수 있다. 중국은 이러한 움직임을 자신에 대한 군사적 견제 시도로 간주하며, 동아시아의 군비 경쟁에 불을 지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분명한 딜레마다. 평화를 수호하려는 행동이 역으로 갈등을 자극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안보 딜레마 속 다자 협력의 필요성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위기는 단순한 양자 관계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러드 전 총리는 다자 외교 채널의 복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이를 위해 한국 같은 중견국이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자주의와 중견국 외교는 과거 냉전 시대와는 다른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면서,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발전한 경제와 외교적 신뢰를 바탕으로 중재자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실제로 한국은 최근 몇 년간 주요 20개국(G20),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등 다자 협의체에서 적극적인 의제 설정자로서의 역할을 강화해왔다. 2024년 G20 정상회의에서 한국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관련하여 균형잡힌 접근을 제시하며 주목을 받았다. 러드는 특히 중견국들이 강대국 간 갈등을 완화하는 완충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한국, 호주,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같은 국가들이 협력하여 역내 대화 채널을 유지하고, 경제적 상호 의존성을 활용하여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이상적인 제안이 아니라 실질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이 그동안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중립적 입장을 유지하며 역내 협력을 이끌어온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지정학적 갈등 외에도 경제적 변수 역시 중요한 안보 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다. 러드는 기술 안보와 공급망 재편이 군사적 충돌만큼이나 중요한 안보 변수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미중 갈등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가속하고 있으며, 이는 동아시아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이 대표적이다. 대만과 한국은 세계 첨단 반도체 생산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고 있으며, 이는 경제적 가치를 넘어 안보적 가치로 인식되고 있다. 미국은 '칩4(Chip4) 동맹'을 통해 한국, 일본, 대만과 협력을 강화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중국의 반발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중국은 희토류 수출 규제, 자체 반도체 산업 육성 등으로 대응하며 기술의 탈중국화(Decoupling) 흐름을 더욱 가속하고 있다. 러드는 이러한 경제-안보 연계 현상이 새로운 냉전의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과거 냉전이 주로 군사적, 이념적 대립이었다면, 신냉전은 기술, 경제, 군사가 복합적으로 얽힌 다층적 경쟁 구도다. 인공지능, 양자컴퓨팅, 5G 통신망 등 첨단 기술 영역에서의 경쟁은 단순한 경제적 이익을 넘어 미래 패권을 결정할 핵심 요소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각국은 기술 자립과 공급망 안정을 국가 안보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있으며, 이는 역설적으로 경제적 상호 의존성을 약화시키고 블록화를 촉진할 위험이 있다. 한국의 역할과 중견국 외교의 중요성 그렇다면 한국은 이러한 복잡한 안보 환경 속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러드는 한국이 중견국으로서의 포지션을 분명히 하고, 다자주의 외교를 통해 갈등 완화와 협력을 도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반도가 지정학적 갈등의 중심에 있는 만큼, 한국은 단순히 강대국들의 전략적 이익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중립적이고 창의적인 외교 전략으로 공조와 협력을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경제 안보와 군사적 안보를 동시에 고려하는 다차원적 안보 전략이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한국은 몇 가지 전략적 선택을 고려할 수 있다. 첫째, 한미 동맹을 기반으로 하되 중국과의 경제 협력도 유지하는 균형 외교를 추구해야 한다. 이는 쉽지 않은 과제이지만,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와 경제 구조를 고려할 때 불가피한 선택이다. 둘째, 다자 안보 협력 체제 구축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ASEAN 지역안보포럼(ARF), 동아시아정상회의(EAS) 등 기존 다자 협의체를 활성화하고, 새로운 협력 틀을 제안하는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 셋째, 기술 안보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 반도체를 비롯한 핵심 기술 분야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면서도, 특정 국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줄이는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해야 한다. 러드는 또한 경제적 상호 의존성을 긴장 완화의 수단으로 활용할 것을 제안한다. 역사적으로 경제적 교류가 활발한 국가들 간에는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 따라서 한국은 중국, 일본, ASEAN 국가들과의 경제 협력을 강화하면서, 이를 안보 대화의 기반으로 삼을 수 있다.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나 포괄적·점진적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같은 다자 경제 협력 체제에 적극 참여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동아시아는 군사적, 경제적, 외교적 측면에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케빈 러드가 지적하듯이, 미중 경쟁, 북한 위협, 기술 안보 경쟁이 복합적으로 얽힌 현재의 상황은 과거 냉전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렵다. 한미일 협력과 중국, 북한의 대응은 단순한 힘의 대립이 아닌, 다층적인 현실을 만들어가고 있다. 한국이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균형을 잡고 스스로의 역할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사고와 다방면의 협력이 필요하다. 중견국 외교, 다자주의, 경제-안보 연계 전략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한국이 실천해야 할 구체적 과제다. 독자 여러분은 이 복잡한 국제 환경 속에서 한국의 외교와 안보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강대국 사이에서 중견국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무엇일까? 이는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할 시대적 과제다.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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