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의 한계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확장 2026년 4월 24일,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프로젝트 신디케이트에 기고한 칼럼 'Beyond ESG: Corporate Responsibility in a Fragmented World'를 통해 현대 기업이 직면한 책임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했습니다. 그녀의 주장은 단순히 ESG(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ESG 프레임워크가 가진 한계를 넘어 더욱 포괄적이고 실질적인 사회적 책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ESG는 기업 경영과 투자 결정의 핵심 기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2004년 UN 글로벌 콤팩트 보고서에서 처음 제시된 이후, ESG는 측정 가능한 지표를 통해 기업의 비재무적 성과를 평가하는 도구로 발전했습니다. 한국에서도 2021년부터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에 ESG 공시가 의무화되는 등, ESG는 이미 기업 경영의 필수 요소가 되었습니다. 국내 주요 대기업들은 ESG 위원회를 설립하고, 탄소 중립 로드맵을 발표하며, 지속가능경영 보고서를 정기적으로 공개하는 등 가시적인 변화를 보여왔습니다. 그러나 라가르드 총재는 칼럼에서 현재 ESG 평가 체계의 근본적 한계를 지적합니다. 그녀는 "현재의 ESG 프레임워크는 주로 기업 가치 제고와 투자자 보호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진정한 사회적 영향력을 측정하고 창출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ESG 점수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ESG 평가기관마다 평가 기준이 달라 같은 기업이 기관에 따라 전혀 다른 등급을 받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2024년 MIT 슬론 경영대학원 연구에 따르면, 6개 주요 ESG 평가기관의 점수 상관관계는 평균 0.54에 불과해, 신용등급 평가기관들의 상관관계 0.99와 극명한 대조를 보였습니다. 라가르드 총재가 특히 강조한 것은 '파편화된 국제 질서'라는 현재의 지정학적 맥락입니다. 미중 갈등, 지역 블록화, 글로벌 공급망 재편 등으로 국제 협력이 약화되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정부의 역할을 보완하거나 때로는 선도하는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기후 변화, 사회 불평등, 공급망 내 인권 문제 같은 글로벌 도전 과제는 국경을 넘어서며, 정부 간 협력이 정체된 상황에서 기업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참여가 더욱 중요해졌다"고 역설했습니다.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면 라가르드 총재의 지적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OECD가 2023년 발표한 최신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지니계수는 0.331로 OECD 평균 0.318보다 높아 소득 불평등이 여전히 심각한 수준입니다. 또한 2024년 한국은행 보고서는 상위 10% 가구가 전체 순자산의 58.5%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기업들이 ESG 보고서에서 화려한 성과를 발표하는 동안, 사회적 양극화는 오히려 심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격차는 ESG가 '측정'에는 성공했지만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김모 교수는 "한국 기업들의 ESG 공시는 양적으로 크게 늘었지만, 실제 이해관계자들의 삶을 개선하는 실질적 변화로 이어지는지는 의문"이라며 "공급망 말단의 노동 조건, 하청업체의 공정거래, 지역사회와의 진정한 소통 같은 부분에서는 여전히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2025년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대기업 납품 단가 조사에 따르면, 주요 제조업 대기업의 협력업체 중 37%가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납품 단가에 반영하지 못해 수익성 악화를 겪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이는 대기업이 ESG 보고서에서 '공정한 거래'를 강조하면서도, 실제 공급망에서는 여전히 불공정 관행이 지속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글로벌과 지역적 맥락에서 CSR의 중요성 라가르드 총재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세 가지 핵심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투명성의 강화입니다. 단순히 ESG 지표를 공개하는 수준을 넘어, 기업 활동이 사회와 환경에 미치는 실제 영향(impact)을 측정하고 보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실현입니다. 이는 1970년대 밀턴 프리드먼의 주주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세계경제포럼(WEF) 창립자 클라우스 슈밥이 주창한 개념으로, 기업이 주주뿐 아니라 직원, 고객, 공급업체, 지역사회, 환경 등 모든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균형 있게 고려해야 한다는 경영 철학입니다. 셋째는 기업 의사결정 과정에 사회적 가치를 내재화하는 것입니다. 이는 사회적 책임을 마케팅이나 홍보 차원이 아닌, 전략 수립과 투자 결정의 핵심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방향은 사실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추구해온 가치와 맥을 같이 합니다. CSR은 1950년대 하워드 보웬의 저서 'Social Responsibilities of the Businessman'에서 처음 체계화된 개념으로, ESG보다 훨씬 오래된 기업 책임 철학입니다. ESG는 CSR의 원칙을 측정 가능한 지표로 구체화한 도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라가르드 총재의 주장은 'CSR로의 회귀'가 아니라, 'ESG라는 도구를 넘어 CSR의 본질적 가치를 실현하자'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이모 교수는 "ESG는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않다"며 "ESG를 체크리스트처럼 활용하는 것을 넘어, 기업 존재의 목적 자체를 '사회적 가치 창출'로 재정의하는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생존 조건"이라며 "특히 MZ세대로 대표되는 새로운 소비자와 투자자들은 기업의 진정성을 예리하게 평가하고, 이를 구매와 투자 결정에 반영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실제로 2025년 한국리서치가 실시한 전국 성인 대상 설문조사에 따르면, 2030세대의 68%가 '제품 구매 시 기업의 사회적 책임 실천 여부를 고려한다'고 응답했으며, 이는 5년 전인 2020년의 41%에서 크게 증가한 수치입니다. 또한 같은 조사에서 2030세대의 73%는 '가격이 다소 높더라도 사회적 가치를 실천하는 기업의 제품을 선택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해외 사례는 이러한 변화의 구체적 모델을 제공합니다. 덴마크의 제약회사 노보 노디스크는 2025년 지속가능성 보고서에서 단순한 ESG 지표를 넘어 '건강 접근성 지수'를 개발해, 자사 제품이 저소득 국가 환자들의 실제 치료 접근성을 얼마나 개선했는지 측정하고 공개했습니다. 이 회사는 2024년 개도국 145개국에서 인슐린 가격을 평균 32% 인하했으며, 이를 통해 추가로 230만 명의 당뇨병 환자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는 ESG 점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회적 임팩트를 창출하는 데 초점을 맞춘 사례입니다. 네덜란드의 전자기업 필립스는 2020년부터 '순환 경제 모델'을 본격 도입해, 2024년 기준 제품의 72%를 재활용 소재로 제작하고 있으며, 의료기기 렌탈 서비스를 확대해 제품 수명을 연장하고 폐기물을 줄이고 있습니다. 이 회사는 2024년 연례보고서에서 순환 경제 모델이 ESG 점수 향상뿐 아니라 원자재 비용 18% 절감과 고객 만족도 12% 향상이라는 경제적 성과로도 이어졌다고 밝혔습니다. 물론 반론도 존재합니다. 일부 경영학자와 기업인들은 사회적 책임 확대가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본업인 수익 창출과 고용 유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ESG 관련 투자와 보고 부담이 과도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2025년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 따르면, 중소 제조업체의 58%가 'ESG 대응이 재정적 부담'이라고 답했으며, 42%는 '전문 인력 부족'을 어려움으로 꼽았습니다. 한국 기업이 나아가야 할 지속가능 모형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책임과 기업 성과는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입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2024년 연구는 지난 10년간 ESG 상위 20% 기업들이 하위 20% 기업들보다 주가 수익률이 평균 2.3%포인트 높았고, 자기자본이익률(ROE)도 1.8%포인트 높았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직원 이직률은 평균 23% 낮았으며, 이는 인재 확보와 유지 비용 절감으로 이어졌습니다. 국내에서도 긍정적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국의 한 중견 화장품 기업은 2022년부터 공급망 전체의 탄소배출량을 측정하고, 협력업체의 친환경 전환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기업은 협력업체 50곳에 총 120억원을 지원해 태양광 설비와 에너지 효율 개선 설비를 설치하도록 했으며, 그 결과 2024년 공급망 전체의 탄소배출량을 2022년 대비 18% 줄이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이 회사 관계자는 "단기적으로는 비용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공급망 리스크 감소, 협력업체와의 신뢰 강화, 브랜드 가치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한국 기업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확합니다. 첫째, ESG 공시를 형식적 의무가 아닌 실질적 변화의 도구로 활용해야 합니다. 단순히 지표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지표가 의미하는 사회적 환경적 영향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개선해야 합니다. 둘째, 공급망 전체의 책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대기업의 ESG 성과가 협력업체의 희생 위에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진정한 지속가능성이 아닙니다. 셋째, 이해관계자와의 진정한 소통과 참여를 확대해야 합니다. 직원, 지역사회,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경영 의사결정에 실질적으로 반영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라가르드 총재의 칼럼은 2026년 현재, 기업이 직면한 책임의 지평이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기후 위기, 사회 양극화, 지정학적 불안정이라는 복합적 도전 앞에서, 기업은 더 이상 경제 주체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사회적 주체로서, 때로는 공공의 역할을 보완하는 주체로서 책임을 다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불평등, 환경 문제, 지역 소멸, 세대 갈등 같은 과제들은 정부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기업의 자원, 혁신 역량, 실행력이 결합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변화가 가능합니다. 이는 기업에게 부담이 아니라 기회입니다. 사회적 가치 창출은 새로운 시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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